구로동맹파업(구동파)이란 1985년 6월24일부터 6월29일까지 6일간 서울 구로동에서 5개 사업장에서 벌어졌던 동맹파업을 말한다. 올해는 40주년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구동파의 역사적인 의의를 정확히 전유하고 당시의 노학연대의 의미를 오늘날에 함께 토론하는 24회 사파포럼을 9월27일 민주노총 15층교육장에서 열었다.
9월27일은 전국적으로 ‘기후정의행진’이 벌어진 날이다. 서울에서도 당연히 벌어졌다. 게다가 이 의제는 지금 한국 사회, 좌우 운동, 단체, ‘시민사회’ 대다수가 동의 지지하는 거대담론, 혹은 ‘보편적인’ 담론과 의제가 되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노총은 노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적 계급적 이슈를 의제화하면서 사회적으로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한채, 현재 시민사회의 지지를 대폭적으로 얻고 있는 기후위기, 기후정의 의제에 조직적인 지지와 동원을 하기로 작정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필 이날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2025년에 토론하고 되살려보자? 어쩌면 그래서 의미가 배가된 주제였고 사파포럼이었다. 왜냐하면 동맹파업이 아닌가 말이다. 구동파는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들의 지역동맹 파업이었다. 정치파업이었다. 그리고 동맹파업은 결국 ‘사회적 총파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후문제 역시 사회적 총파업 속에서 의제로 구성되어야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동파는 기후위기와 기후정의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가질 것이다. 노동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아니고서는 정말 ‘기후위기’가 해소될 수 없고, ‘기후에 관한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면, 우리는 기후만 말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한국 자본주의 속에서 노동중심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도 토론해야 할 것이다. 아니 노동계급운동은 적어도 그렇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 점만으로도 이 날 사파포럼의 주제는 의미가 있었다.
사파포럼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발제자의 발제가 이뤄졌다. 어떻게 구동파는 가능했으며, 어떻게 구동파는 동맹파업의 의미를 구체화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노학연대 혹은 넓혀서 노동과 노동외부의 좌파는 연대를 넘어서 하나의 투쟁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구동파에 대해서 참가 노동자들의 구술은 기록되고 책으로도 엮어나왔다. 하지만 당시 참가했던 노학연대자가 ‘당사자’로 구동파를 증언하고 의미에 대해서 발제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발제자인 권영숙 사파기금 대표는 당시 서울대 노학연대 (LT)의 일원이었다. ‘노동운동탄압’에 맞선 구동파는 대우어패럴 노조위원장과 사무장 체포등을 계기로 4일간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위장취업 학출들과 학습모임을 통해 각성된 주변 2개 사업장이 오후에 바로 동맹파업에 들었고, 이후 2개 사업장이 더해졌다. 이른바 ‘민족민주운동’의 지지 행동도 있었고, 지역에서 구동파 연대 움직임이 산발적으로 있긴 했지만, 구동파 당시 구로동에서 가두투쟁과 매일같이 유인물을 대대적으로 뿌리는 가두 선전을 주도한 것은 서울대 중심의 노학연대투쟁(노투)와 비합법 정치서클들, 그리고 구로동 현장에 들어간 ‘위장취업 학생운동 출신(학출)들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과 언론의 흑색선전과 탄압, 단수 단전조처 속에서 단식파업이 된 상황의 지속, 동맹파업 사업장들이 구사대 침탈로 하나씩 격파되는 가운데, 대우어패럴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었다. 이때 6월 28일, 29일 양일간 서울대 학생 18명이 공장 지붕을 타고 공장내 농성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합류하며 공장내에서 환호성이 터지면서 기세를 올리자마자, 구사대와 사복경찰들 4-500명이 협공으로 공장내로 침탈하여 파업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며 파업을 강제 종결지었다.
구로동맹파업동안 5개 사업장에서 1400명이 동맹파업을 벌였고, 5개 사업장에서 연대투쟁을 벌여 총 2500여명의 노동자가 투쟁에 참여하였다. 구동파로 노동자 43명이 구속되고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이었고 해고노동자가 1500여명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구속자, 수배자등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다. 권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구로동맹파업의 현장내 결과는 노조탄압을 분쇄하지 못하고 노조의 궤멸이었다.
결과론을 중시하는 이들은 또 맹동주의라 하겠지만,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민주노조운동’이 이제 70년대와 달리 80년대 전반기 변혁운동 속에서 노학연대와 위장취업 학출들과의 결합을 통해 계급적 노조운동으로 진화하는 것을 극구 막기 위한 국가와 정권, 자본의 노동운동 탄압은 결국 넘어서야 할 도전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가 6월 24일 파업을 시작하면서 낸 입장문처럼 말이다. 즉 “노예로 살 것인가, 싸워 이길 것인가”의 기로였다.
구로동맹파업은 민주노조와 변혁운동의 결합의 단초였고 계급적 노조운동의 맹아였다. 노학연대와 위장취업 학출들이 구로공단 수십개의 공장안으로 스며들어가 만든 조직적인 성과였다. 노동자들 역시 70년대처럼 자생적인 노사분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학습을 통해서 스스로 의식화되어 일으킨 동맹파업이었다.
하지만 ‘최초의 동맹파업’이란 기록은 지금까지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이라는 이름의 조직노동화가 이뤄졌지만, 기업별 노조에 불과했던 80년대 전반기, 후반기보다도 노동계급의 계급적 단결은 허약해졌고, 동맹파업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총파업이 뻥파업이 되었다 한탄만 하기전에, 지역내 업종 산별, 기업규모, 정규직 비정규직을 뛰어넘는 1985년 구로공단에서 벌어졌던 ‘지역동맹파업’에서부터 교훈을 얻고 그 맹아적인 형태를 실천하는 것은 어떨까? 발제자의 마무리 결론이었다.
포럼은 오늘날의 노학연대에 대해서 제대로 토론하지 못했다. 토론자들은 1985년 구동파의 역사적인 사실과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집중했다. 그만큼 낯설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왜 가능하지 않은지에 대한 토론으로 비약했다. 그 중간을 채워야할 것이다. 발제자 말대로 잠재태를 가능태로 만들고, 이를 현실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운동이고, 그것이 운동의 역사로부터 배워야할 점이라는 점에서.
한국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하여!
총파업과 사회적파업의 정신으로!
2025. 10. 09.
사회적파업연대기금